미카일8세부터

 비잔티움 연대기의 최종권은 라틴제국 소멸(1261년)부터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1453년까지를 다룬다. 콘스탄티누스가 도시를 제국의 수도로 옮긴 지 1000년 가까이 됐을 때다. 비잔티움 제국은 나름대로의 흥망성쇠를 거듭한 끝에 그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미카일 팔라이올로그스는 황폐한 도시 재건에 주력했다. 황제는 서구세력의 침탈로 멸망할 뻔한 제국을 찾아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를 펼쳤다. 덕분에 비잔티움의 전 역사 중 가장 위험한 시기에 제국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 백성들은 황제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라틴파 교회의 교리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국제 관계를 안정시키려는 황제의 의도는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혀 그에게는 사후 추방령이 내려졌다.

저자는 미카일이 왕조를 세운 니케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정치의 중심을 옮긴 것을 비판으로 본다.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아나톨리아에 투르크와 몽골이 더 빨리 침투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또 군사적인 면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뒤 유럽 방면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아나톨리아에서는 투르크와 몽골이 제멋대로 활개치며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제국의 수도가 그대로 니케아에 있었다면 소아시아 서부의 제국 영토는 더욱 안전했을 것이다…그런 점, 정부가 콘스탄티노플에 복귀한 것은 재앙을 부른 것이나 다름없었던 p.90 미카일 8세의 아들 안드로니쿠스 2세는 반란을 일으킨 손자 안드로니쿠스 3세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손자 안드로니쿠스는 참모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의 도움을 받아 법개혁과 부정부패 근절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안드로니쿠스 3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요한네스 5세와 칸타쿠제누스는 제위를 놓고 내전을 벌이게 되고 얼마 남지 않은 국력을 소모한다.

그 사이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오스만투르크가 있다. 오스만 술탄 오르한은 칸타쿠제누스와 결혼동맹을 맺고 스스로 가신을 자처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만의 군사력은 비잔티움의 우위에 서게 됐고 황제 요한네스 5세는 서쪽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로마에 도착한 요한네스는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신성한 로마 교회와 그 아버지인 교황에게 복종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공식 서명하고 제국의 옥새를 찍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행위이며 황제 본인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구속력이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두 교회가 통일되거나, 세계공회의가 열리거나, 투르크에 대해 군사지원을 할 가능성은 없었다.p.220 요한네스 5세는 이제 술탄의 가신이 됐다. 요한네스 7세와 마누엘 2세를 거쳐 요한네스 8세에 이르는 동안 비잔티움은 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오스만의 영토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유럽 땅에까지 확장됐다. 술탄 무라드 2세는 비교적 온건한 지배자였다. 무리한 정복전쟁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에 대항해 온 적들에게는 무자비한 무장이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와 코소보에서 서방병을 물리쳤고, 비잔티움 황제 요한네스 8세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됐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는 전 황제의 동생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제위에 올라 끝내 교회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황제다. 서구의 지원을 얻기 위해 추진한 교회 통일정책에 대해 시민들의 반감이 큰 상황에서 서방은 황제의 미온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와중에 오스만 제위는 호전적인 청년 메메드 2세에게 넘어가고 콘스탄티노플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비잔티움을 오스만 세력권 내에 독립시키려 했던 아버지 무라드 2세와는 달랐다.1453년 1월에 메드는 신하들을 아드리아노플로 불러들였다. 비잔팀은 여전히 위험하다. 비록 약해질지라도 그 백성들은 오스만 왕가에 얼마든지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타고난 음모자들이다.p . 365

메드는 울반의 대포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전쟁 초반 군사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힘입어 선전했다. 하지만 메드가 갈라타 언덕을 넘어 함선을 이동시키는 묘수를 썼고 오스만 함선이 황금빛 뿔로 진입하자 전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1453년 5월 29일 57일간의 공방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고 만다. 자신의 도시와 함께 산화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최후는 비장했다.마침내 패배를 통감한 그는 황제 기장을 벗어던지고 친구와 함께 전투가 치열해지고 있는 전쟁터 한복판으로 몸을 던졌다. 그 후 그를 본 사람은 없었던 p.396 찬란한 제국의 최후가 허망한 반면 전쟁터 한가운데서 흔적 없이 사라진 황제의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정복자 처분에 몸을 맡긴 서로마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동생 쿠스투루스와 비교되기도 해 부상을 이유로 자리를 지켜달라는 콘스탄티누스의 요청을 뿌리치고 전장을 떠났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조반니 주스티니아, 롱고가 생각나기도 했다. 황제는 도시를 뚫고 기회를 찾겠다는 제안도 거부한 채 제국과 운명을 같이했다. 쓰러질 듯한 천년제국의 황제다운 선택이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5권으로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던 서술은 종권 전체를 긴박감으로 채웠다. 제국을 살리기 위한 황제들의 행동, 그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 콘스탄티노폴리스 최후의 공방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뷔잔티온에 호의를 가졌던 에이전트 2세 통치기에 무리한 도발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코린토스 지협의 헥사미르리온에서 처음으로 대포의 위력을 확인했으니 오스만에게 미뤄질 가능성이 대포 기술자 우르반을 어떻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여러 가지 가능성이 부상했지만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꾼 '만약'은 성립되지 않는다.

역자인 고 남경태 선생은 "오늘날 서양사에서 서구나 비잔튬 제국 간에 오갔던 활발한 교류가 생략"되었다고 지적하고, 『비잔티움 연대기』가 "그 역사적 공백을 메워" 서울 수 있다고 썼다.이처럼 지리, 문화, 종교적으로 주변 세계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제국, 인류 역사상 단일 제국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비잔튬 제국이 15세기에 폐업한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대사건이며, 향후 세계사적 대변혁의 기폭제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제국의 역사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서양사에도 중앙아시아사에도, 그리고 향후 세계사적 대변혁의 기폭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19' , 일반인을 위한 역사책'으로서 이 책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뷔잔티옹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각 황제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여 그들의 공과를 명확히 하고 편향 없이 그 인물을 판단해 볼 수 있었다. 과거 '비잔튬'이라는 명칭으로 막연한 이미지로 간략하게 기술되던 역사가 이 책 덕분에 다른 모습이 됐다. 서구와 영향을 받은 가운데 자신의 역사를 화려하게 썼던 나라, 나름대로의 번영기와 쇠퇴기를 거치고 그 안에 매력적인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제국. 이것이 비잔티움 연대기가 다시 제시한 제국의 모습이다.

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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